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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주 발행인
경주에서는 저녁에 친구와 식사를 하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보다는 이곳저곳에서 여럿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식사를 하는, 즉, 단체생활을 하는 풍경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몸은 하나인데 모임이 많아’ 얼굴만 내밀고 회비만 전하고 사라지곤 한다. 마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것 같다.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온 이들 입에서 경주를 떠올리면 모임이 많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올법한 상황이다.
경주와 같은 오랜 역사가 근간이 되는 도시의 경우 학연과 혈연, 지연의 끈끈한 연결고리가 지역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서 너 사람만 거치면 연결되는 관계는 각종 사회단체나 봉사단체, 소모임으로 이어져 이들 단체들이 경주사회의 주축이 되곤 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경주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대략 400여 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외에도 소규모 모임이나 각 직능별, 연령별, 지역별로 세분화해보면 대략 1000여개는 족히 되어 보인다.
경주가 다른 시·군에 비해 각종 단체가 유달리 많은 것은 가장 먼저 성씨姓氏에 의한 혈연관계 중심에서 시작된다. 경주는 고대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육부촌 성씨에서부터 각 성씨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여러 문중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종손과 주손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혈연이라는 끈끈한 연결을 통해 각종 모임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학연도 각종 모임을 양산하는 창구가 되고 있다. 경주에서는 ‘A학교를 나오지 못하면 안된다’ ‘B학교가 경주를 좌지우지 한다’는 등의 여론이 팽배해 있다. 이러한 경쟁은 총동문회, 동기회, 반창회, 동호회로 이어진다. 단체가 또 다른 단체를 양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역 내 학교 간 그룹이 명확하다보니 ‘C학교’ 졸업생들이 어떤 것을 한 가지 하면 ‘D학교’에서 뒤질세라 따라하는 형국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초·중·고를 경주에서 다닌 10명을 모아놓으면 최소한 3~4명은 학교 선후배 관계다. 그렇다보니 같은 동문들 내에서도 소그룹 모임을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명분으로도 모임을 만든다.
또, 소지역별 동향同鄕모임도 활성화 된 곳이다. ‘타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하듯 같은 지역 출신들 간에 연결고리 또한 대단한 곳이다.
읍면지역에서 자라서 시내권(동지역)에 살게 되면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향우회라고 칭한다. 좁은 경주에서 학연과 혈연, 지연은 이렇듯 대단한 결속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전국단위의 시민사회단체 아래 각 읍면동별 소속단체로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단체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행정기관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 단체, 자생적으로 회비를 모아 운영하는 단체 등 다양하게 집합해 있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각 직능별 단체다. 문화와 예술, 노동, 체육, 환경, 경제 등 다양한 부문별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다. 물론 취미생활로 모이는 산악회 등 동호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단체들이 많다보니 폐단도 만만치 않다. 목적에 따라 편 가르기가 심하게 일어난다. 학연과 혈연, 지연으로 다져진 관계에다 각종 단체에 소속돼 활동을 하다 보니 개인의 의사는 무시되기 십상이다. 다수에 의해 입장이 정해지면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같은 회원’이라는 이유로 동조를 강요당한다. 물론 그 뒤에 선거직, 권력과 돈을 거머쥔 이들의 교묘한 내편 만들기도 간혹 있다. 그렇다보니 순수 민간단체로 분류되는 일부 시민단체들의 활동은 힘에 겹다.
권력을 견제하고 시민들에게 건강한 시민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은 외롭다. 이 같은 현상은 비판과 견제, 대안을 제시하는 문화보다는 그저 서로 알기 때문에 적당히 넘어가자는 문화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경주지역 단체가 다른 도시에 비해 월등히 많다고 해서, 학연과 혈연·지연이 있다고 해서 좋지 않다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생각이다. 다만 이러한 관계들이 지역사회에 건전하고 발전적인 역량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단체의 이익을 위한 편리로 이어지는 것이 문제다. 단체가 많다고 지역이 폐쇄적이거나 나쁜 것 또한 아니다. 많은 단체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모임을 만들고 동참하는 열정과 에너지를 경주발전과 건전한 사회풍토를 만들어 가는데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칼럼은 2013년 8월 23자 내용이며 칼럼집 ‘이성주의 慶州萬事’에 수록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