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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역사문화 발굴과 보존, 계승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경주시대’는 창간을 맞아 ‘경주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서’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힘들었던 1950년대 경주시민들에게 지식의 장, 공부하는 장으로 기능을 했던 경주도서관(당시 경주읍립도서관)의 설립과정과 역할, 도서관을 위해 헌신한 엄대섭 선생의 발자취를 준비했다.[편집자 주]
경주시민의 공동서재 공공도서관
(2)경주의 지역 특성을 반영한 도서관
경주시립도서관의 풍경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경주시립도서관은 특징이 많았다. 외부 전경부터 살펴보면 대지 2,800평(약9,240㎡)의 넓은 공터에 시내 중심가 방향인 북쪽으로 정문이 있었다. 지금은 동쪽 금성로 방향에 출입구가 있고 1965년 ‘어린이 헌장’ 동상이 세워졌다. 제법 넓은 뜰을 지나 도서관 현관이 있고, 맞은 편 남쪽은 넓은 창으로 되어있다. 앞뒤 정면에서 보면 직사각체로, 좌우 양쪽 측면에서 보면 오목한 오각체로 보인다. 일반적인 건물 지붕이 고깔형이라면 이 건물은 역으로 자형에 가깝고 지붕 가운데로 배수가 되도록 했다. 이 설계는 우리 전통 한옥 지붕을 뒤집어 놓은 형상이라고 한다.
현관 오른쪽에는 경주를 상징하는 탑 조형물을 세우도록 설계했으나 탑을 올리지 못하고, 향후 올리기 위해 탑실 건립 예정지를 남겨두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남쪽 면은 큰 창을 내어 자연채광을 활용했는데 겨울에는 볕이 들어 따뜻했으나 여름에는 햇빛이 강해서 신문지를 붙여 차단하기도 했다. 북쪽 벽과 천정에는 단열재로 외부의 찬 공기를 차단하고 당시 귀하던 형광등을 달아서 전력도 아끼고 시력 보호에도 신경 썼다. 그때 경주시립도서관을 이용했던 분들의 기억에 따르면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건축양식은 상당히 현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도서관 터는 기차역이 있던 자리라 철길 특성상 자갈밭이었다. 시에서 공원을 조성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구체적인 계획 없이 방치되고 있었다. 도서관이 설립되자 김종준 선생을 중심으로 직원들이 주변 환경미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독서회원들도 힘을 합하여 화단을 가꾸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자갈을 걷어내 채로 거른 다음 자갈은 배수로에 깔고, 부드러운 흙으로 바닥 위를 덮어서 화단을 만드는 일에 독서회원들도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자원봉사를 점수제로 하여 높은 점수를 받은 회원에게는 우수회원으로 대출 우대권을 주기도 하고, 독서회원이 아닌 학생들은 회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봉사했다.
정재영 선생은 “김종준 씨가 ‘우리는 문화 사업을 하는 문화인이니 문화인답게 주민들에게 친화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친절히 잘 대해라.’고 해서 직원들은 주민들에게 친절하게 대했지요. 그래서 도서관을 중심으로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모였고, 학생들과도 친근하게 잘 지냈어요”라고 당시를 설명했다. 주민들과 친화는 자연스럽게 도서관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받을 수 있었고, 그들의 도움으로 직원과 독서회원들 손으로 자갈밭을 화단으로 만들고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꾸었다. 그 화단이 지금은 서라벌문화회관 주차장이 되었고 근처에 황리단길이 개발되어 늘 관광객들의 차량으로 빈틈이 없다.
향토자료실부터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경주가 천년의 신라 문화유산을 가득 품고 있는 옛 도시라는 상징성을 담고자 했다. 지역주민뿐 아니라 외지인들에게도 경주를 알릴 수 있도록 개방했으나 전시품은 확보하지 못했다. 대신 신문이나 잡지가 귀하던 때라서 연속간행물과 열람석을 비치하여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신문은 각 2부씩 구독하여 한 부는 보관용으로 서고에 비치하고, 나머지 한 부를 열람했다. 당일 신문은 열람용 책상 위에 진열하고 지난 신문은 신문대에 묶어 두고 한 달간 비치했다가 특정 기사나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해 스크랩할 수 있도록 내주었다.
김윤근 선생이 과학 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도 당시 신문에서 과학 관련 자료들을 모아서 스크랩했다가 다시 보는 재미로 과학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람석은 읍사무소 시절부터 사용하던 목재 책상과 긴 의자를 놓았는데 언제나 만원이라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독서회원들은 업무시간이 끝난 후에는 열람책상을 붙여놓고 탁구대 삼아 탁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정규 운영시간이 끝난 후에는 각 열람실에서 독서회 활동을 했다. 서고는 반개가제를 원칙으로 했으나 신착도서와 참고도서는 대출대 앞에 개가제로 비치하여 이용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대출대에 수기로 쓴 열람용 책자 목록을 비치해 놓았다가 나중에 엄 관장이 자비로 구입을 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기증받았는지, 카드 목록함을 들여와서 복도에 열람용 목록카드를 비치했다고 한다.
<대한도서관연구회> 시절 엄 회장은 전국공공도서관 순방을 하고 나서 개가제실시를 촉구하면서 지방의 소규모도서관에서 당장 서고를 개방하기 어려운 곳은 주요도서나 베스트셀러 만이라도 별도 서가를 만들어 개가제를 시작하도록 촉구했다. 이러한 발상은 경주시립도서관 운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청각실에서 다양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당시는 교육이나 문화예술의 중심이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에 몰려 있어서 지방에서 문화적 혜택을 누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경주시립도서관에서 매주 토요일 강연회를 열고, 영화상영회, 음악감상회, 미술품이나 문화유산 전시 등을 개최했는데, 영화상영회나 음악감상회를 할 때는 암막 커튼이 없어서 신문지로 창을 가렸다. 김윤근 선생은 중학교 2학년 때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이며 ‘운명’ 같은 클래식을 접했는데 그때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 있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기자재는 경주 출신으로 전남방직 임원이던 이종기 씨가 기증한 것이다. 경주시립도서관 서고에 비치된 ‘영국문고永國文庫’ 표지판에 이종기 씨에 대한 소개가 있다. 그 내용에 ‘당시의 경제 사정으로 결코 구하기 쉽지 않았던 환등기, 녹음기 등 필요한 기자재까지 마련해 주며 재정이 부족한 도서관의 여러 면모를 향상시키는데 앞장섰다’라고 적혀 있다. 이런 도움으로 그 어렵던 시절에 도서관에서 각종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62년부터는 박물관에서 운영이 어렵게 된 ‘어린이박물관학교’를 시청각실에서 운영하여 지역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는 정신을 이어갔다. 1975년 경주박물관이 신축하여 어린이 박물관학교를 다시 개강하게 되자 ‘경주도서관 어린이향토학교’와 ‘경주 어린이박물관학교’로 분리했다. 이와 같이 경주도서관은 박물관 등 지역사회와 협력하여 고유문화를 지키며, 지방에서 누리기 어려운 각종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시민의 편의를 위해 공간을 개방했다. 여기에 주민들도 도서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글=정선애 작가
정선애 작가는?